1.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기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 이 가을, 그대의 삶은 어떤 수확과 마주하고 있는지요?
  - 직장을 옮겼다. 어떤 수확일까? 나은 방향으로 혹은 모자란 방향으로?
    같은 방향은 아니길 바란다.

이 숲에는 요즘 우리 꽃 물봉선이 한창이다. 야생의 것들은 모두 제 자리를 찾아 살 때 가장 빛나는 삶을 산다. 물봉선은 졸졸 흐르는 물을 따라 피어난다. 그 자리에서 군락으로 필 때 가장 아름답다.

 

가을입니다. 가을을 맞아 오늘은 아주 조금 긴 편지를 쓰려합니다. 그대의 가을은 어떠신지요? 이곳의 가을은 풍성합니다. 소쩍새 우는 숲 근처 밤나무에서는 밤새 알밤이 떨어지고, 부엉이 우는 바위 숲 기슭에는 어느새 버섯들이 올라옵니다. 집 앞 텃밭에서는 오늘 마지막 옥수수를 땄고, 곧 고구마를 캘 날을 가늠하는 중입니다. 옥수수대를 자른 자리에는 다시 김장용 배추와 무우, 쪽파를 조금씩 심어두었습니다.

 

올 한 해 나의 농사는 실험이었습니다. 비료와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밭에 자라는 풀도 뽑거나 베지 않았습니다. 유기농법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내버려둠 농법이라 불러야 옳은 농사였습니다. 땅과 하늘이 허락하는 만큼만 먹으리라 작정했기에 조바심 없이 그들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근처 밭에 농사를 지으시는 할머니는 내 밭의 풀을 볼 때마다 혀를 찼습니다. 수확이 어려울 것이라고 염려하셨고, 제초용 농약을 쳐야 한다는 조언도 자주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직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땅과 하늘의 힘 만을 빌어 농사를 지을 때, 저 밭에서 과연 어떤 맛의 작물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 지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농사는 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여 종의 쌈 채소 중, 두어 종은 아예 한 장의 잎도 먹어보지 못하고 곤충들의 만찬용으로 팔려 나갔습니다. 주력 작물이었던 괴산대학찰옥수수는 양분이 부족한 지 누런 잎으로 변한 채 작은 키에 머물렀습니다. 당귀와 고구마 줄기는 풀에 갇혀 제 잎을 보기 어려웠고, 브로콜리는 풀에 덮여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농사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자줏빛 도는 가지는 내내 좋았고, 참외와 오이도 그럭저럭 괜찮았으며 고추는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토종벌은 한 통을 잃었으나 나머지는 아직 잘 지내고 있습니다. 옥수수는 볼품 없이 작았지만 염려했던 벌레는 거의 먹지 않았고, 그 맛 또한 천하 일품이어서 나눠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입니다. 맛을 보신 그 할머니 농부는 심지어 내년에는 나의 농사법을 따라 하시겠다고 까지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망 없을 것 같던 고구마와 당귀는 이제 막 사위어 가는 그 풀 더미 속에서 드디어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무지막지한 풀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이 실험을 통해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순환의 중요성입니다. 1945년 우리나라 밭 토양 속에는 4.5% 정도의 유기물(humus)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략 1.9%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는 작물을 거둔 뒤에는 반드시 두엄과 퇴비를 되돌려 땅의 고단함을 위무했던 농법이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해 작물의 양분을 채우고 병을 막는 농법으로 바뀐 탓입니다. 반 세기가 넘는 수탈을 겪은 땅에 비료 없이 농사를 지었으니 내 옥수수의 부실함은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요즘 농작물의 모양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으나 그 맛과 건강성은 60년 전 자연농법의 그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내버려둠 농법을 통해 나는 되돌림을 무시하는 효율의 해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다양성의 유익함에 관한 것입니다. 나의 밭에서 벌레로 인해 실패한 작물은 두어 가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곤충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이웃 농부 모두가 궁금해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다양성을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제초제로 풀을 다 죽이면 곤충은 먹을 것이 없어서라도 농작물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먹이인 풀이 있다면 농작물을 덜 찾게 됩니다. 또한 다양한 곤충들이 밭으로 찾아와 자기들 간의 천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품종 소량의 작물을 다양한 풀과 함께 자라게 한 다양성 농법으로 나는 살충제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생물 다양성의 보고인 숲과 붙어 있는 밭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셋째 작물의 토양 적합성에 관한 것입니다. 버드나무가 산 정상의 메마름을 견디며 자랄 수 없어 물가 주변에서 주로 자라듯, 작물 또한 제 꽃을 마음껏 피울 수 있는 땅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자랄 수 있습니다. 이번 실험을 통해 나는 이 밭에 심어도 좋을 작물과 심지 말아야 할 작물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

 

나의 밭에서 딴 고추는 한 여름 실온에서 보름을 넘겨도 신선합니다. 냉장실에서는 한 달 넘게 그 신선함을 유지합니다. 비료와 농약을 써서 키운 고추는 그 절반의 시간도 견디지 못해 신선함을 잃고 썩어갑니다. 나의 밭에서 나온 모든 작물의 맛 또한 화학농업으로 거둔 작물의 그것과 비교를 불허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 그대로의 것들이 갖는 위대한 힘일 것입니다. 장차 내가 상품성을 갖춘 농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은 한 가지에 집중될 것입니다. 그것은 땅심을 높이는 것입니다. 위대한 자연의 힘이 선순환의 구조를 갖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자연스러운 농사와 함께 자연스러운 삶에 대해서도 실험하고 있습니다. 가설적 모델은 이렇습니다. ‘풀을 견뎌 자신을 꽃피우는 작물들처럼 사람 또한 본래 스스로 위대함을 지닌 존재이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여 자기답게 결실에 이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며 어떠한 실천이 필요한가?’ 언젠가 그 결과를 나는 꼭 책으로 펴내어 공유하고 싶군요. 이제 그대에게 여쭙니다. 이 가을, 그대의 삶은 어떤 수확과 마주하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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