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 From Here

: 1기가 기획하는 퇴근 후 렛츠 2기 프로그램 기획 안

 

1. 기획 목적 : 2010년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10년 후 나를 상상한다' 퇴근 후 렛츠 프로그램의 1기 수료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바탕으로 20112기 프로그램의 전체 운영 안을 기획하고 그 구체적인 참여 방안과 예상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함

 

2. 2기 운영 모토 : 'Action From Here' 10년 후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변화하기 위하여 지금 여기 현장에서 작으나마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 계획 방안들을 모색함. 단 모든 변화는 즐겁게 ^^

 

3. 프로그램 운영 방안

. 전반전 : 10년 후 상상이 필요한가?

강의_1 : 최재천 교수 - 2020년 초고령화 사회를 대비하여 우리 사회는 은퇴 후 10년이 아닌 50년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함. 강의 전 서대문 둘레길 혹은 성북동 걷기를 통한 아이스 브레이킹.

강의_2 : 제윤경 이사 - 은퇴 후 필요한 건 ''이 아니다. 노후 자금에 현재를 희생하지 마라.

강의_3 : 유지나 교수 - 현재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건 '호모루덴스'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 후반전 : 즐거운 대안들

강의_4 : ??? - 직장인 합창단, 밴드 공연 후 평범한 직장인에서 '반전'을 이루신 분 강의

강의_5 : ??? - 생활협동 조합, 아름다운 가게 등 현장 방문 후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 기업 사례 소개

강의_6 : ??? - 1기 분들의 수강 후 변화 사례를 짧게 소개(10*3), 원순 씨 강연, 독서 및 글쓰기 강의, 10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로 마무리 & 뒷풀이

 

4. 1기 참여 방안 및 예상 문제점

 1) 참여 방안

  . 프로그램 참여 : 변화 사례 소개(3), 사회자 역할, 기획안 문서 공동 작성, 사진 찍기 등 재능 기부, 1기 대상으로 심층면접 실시

  . 아이디어 제공 : 1 Q&A 강사 분 전달, 페이스 북 활성화, 음주 강의, 오픈 강의

 

 2) 예상 문제점

  . '관계' 증진 방안은 여전히 미흡하므로 첫 만남 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참가자를 소개하는 등 추가 아이디어가 필요함

  . '1 2' 워크샵 진행 여부, (추가로 무엇이 있을까요? ^^)

 

5. 기타

. 각 행동 계획 별 담당자 및 일정 등의 상세 세부 계획 작성 필요

. 희망제작소 연구원들과 협력 및 업무 분장 협의 필요



끄적끄적(공식 문서 이 후 혼자만의 후기)

. 백수된지 짧으면 짧은데 문서를 만들어 보니 그새 현장 감각이 많이 떨어진 것 같음. ^^

. 변화 사례 소개 후보 : 이윤모 님, 우인규 님, 전환길 님, 김민정 님, 유상모 님, 마녀(^^) , 정은주 님, 이정훈 등등.

. 핵심 키워드는? Action from here, 학생이나 퇴직자가 아닌 생활인이자 전문가인 직장인 대상 교육 기획,

. 고려 사항? 1 2일 워크샵을 할 경우 50% 이상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인가? 타겟 고객층을 진보 성향 직장인으로 좀 더 집중할 것이냐? 혹은 다양한 관심사의 반영?

. 1기 피드백? 강의하시는 분들이 모두 교수, 변호사 등 전문직이라 태어날 때부터 DNA 다른 분들 같아 약간 거리감을 느낌, 사회적 기업 등 공익적 가치를 너무 강조하는 게 아닌지, 직장인들은 아카데믹한 것 보다는 실질적인 것에 더 공감한다. 교육생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지 않은가?

. 기타 제목 후보? '10년 후 나를 상상한다' 퇴근 후 렛츠 2기 기획 안, 1기가 기획하는 퇴근 후 렛츠 2기 프로그램 운영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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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몰라요

Posted at 2011. 1. 21. 09:33// Posted in 책을 쓰자
#fb
야구, 몰라요.
- 하일성

2009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때와 똑같이 수원 삼성전자에 회의를 다녀오는 길이다. 회의가 늘 그렇듯 결론은 나지 않고 추가로 자료 조사를 해서 다시 보고하겠다는 수준으로 마무리 되었다. 시간이 점심 때라 같이 간 영업팀 김 모 차장과 가까운 곳에 차를 세우고 만만한 순대국밥 집으로 들어갔다.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가다 김 차장이 은퇴하신 전 사장님이 응급실에 계시는 걸 아는지 물어본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운 편인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 대리 그것도 몰라? 지난 2월에 쫓겨난 사장님 지금 삼성병원에 있어. 그것도 영화에서 보던 외부인 일체 출입 금지되고 산소 커튼인가 먼가 하얀 거품 나오는 중환자실 있잖아. 벌써 2달이나 되었데.”

믿기지가 않았다. 얼마전까지 현업에서 건강하게 활동하는 분인데. 삼성 계열사 사장님 이셨던 그 분은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장까지 오른 분이다. 삼성 그룹 임원만 15년 이상 꽤 오래 하셨다. 주변의 전무, 상무 등 높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반 말단의 직원들에게는 온화하셨다. 체육 대회 등 전 임직원이 참여하는 행사에서는 늘 트로트로 부르시며 소탈한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롤모델’ 정도될까? 사돈에 팔촌까지 통들어도 고위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재능도 극히 평범하여도 열심히 노력하면 사장님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가지게 만드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그 분이 지난 정기 임원 인사 이동에서 물러나셨다. 삼성 그룹 내에서 60살 이상의 임원을 정리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얼마 지나고 나서다. 해마다 삼성은 목 두꺼우신 42년 생 회장이 젊은 조직 운운하면 자기보다 젊은 분들이 우수수 물러 난다. 그건 2008년, 2009년, 2010년 해마다 똑같다. 우리 사장님도 48년생이시니 연세가 꽤 되셔서 명퇴를 당하셨다.  그만두시고 소일하시던 사장님은 3월 어느 토요일에 사모님과 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을 보셨다. 돌아오는 월요일은 두 분이 하와이로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30년만의 두 분 만의 오붓한 휴가이시지 않으셨을까?
 
물론 나도 들은 이야기라 정확하지는 않은데 사장님이 뮤지컬 잘 보시다가 조금 어지럼증을 느꼈다고 하였다. 요즘 나이에 62살이면 젊은 편이니 괜찮겠지 하셨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셨다. 그 길로 응급실에 가신 사장님은 깨워나지 못하셨다. 평소에 늘 운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 직원들에게 늘 건강을 강조하는 하는 분이셨다. 전사 산행을 하면 직원들에 비하여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시기도 하셨고, 늘 기운이 넘쳐 목소리에는 항상 에너지가 느껴지시는 분이었다. 아마도 8할은 퇴임 이 후의 충격이 아니었을까 쉽다.

어안이 벙벙했다. 앞에도 말했듯이 사장님 정도면 평사원들의 롤모델이다. 아마 평범한 샐러리 맨들이 한 번쯤 꿈꾸는 이상형 아닐까? 열심히 일하면 삼성이라는 대기업에서도 임원이 될 수 있다, 임원이면 인센티브가 엄청나다고 하더라, 또 전용 차, 전용 운전사, 전용 비서 등 따라오는 처우가 셀 수 없다고 한다. 소문에 사장님은 오랜 임원 생활으로 강남에서 현금 부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제 막 은퇴하시고 여행 다니시면서 자기도 돌아보면서 조금 여유있게 사시려고 하는데... 너무나도 짧다.

‘샐러리 맨은 아무리 성공한다고 해도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진을 하고 좋은 부서로 이동을 하고 포상을 받고 그런 것들이 참으로 허망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 끝은 먼데? 라고 묻는다면 별다른 답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회사 생활은 승진만이 전부가 아니다. 승진을 조금 미루고 천천히 살아가시는 분들도 참으로 많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럼, 회사를 벗어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사장님은 현업에 계속 계셨으면 건강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회사란 놈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한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 하는 것일까? 물론 혼자서 망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퇴직과 크게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았다. 과연 나에게 회사란 내 청춘을 바칠만한 곳인가? 퇴직이라도 당하면 어떡할 것인가?  사춘기 시절은 물론 대학교에서 한 참 놀 때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에 조금씩 발목이 잡혀갔다.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아마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비슷하였듯이 생각이 많아졌다. 덕수궁 추모 행렬에 선 나의 고민에 ‘죽음’까지 더해졌다.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이란? 인생의 유한성 등등 정답이 없는 문제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고 난 후 월요일 출근을 하니 사장님이 5월 22일에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렇게 5월이 깊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고민들은 나에게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해 10월 삼성에서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였고 다음 해 12월에는 그 회사도 그만 두었다. 평소 관심 있었던 독서 및 글쓰기 관련 수업을 몇차례 들었고 직접 독서 토론 강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00일 동안 매일 글을 쓰는 프로그램도 참가 하였고 희망제작소라는 시민단체에서 주관한 직장인 강의도 재미있게 들었다.    

그랬다. 그 날 점심 시간의 충격, 그리고 떠올랐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나머지 시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비교적 예측 가능했던 내 인생이 어느 야구 해설자의 말처럼 모르는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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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에 대한 열정

Posted at 2011. 1. 18. 08:54// Posted in 책을 쓰자

#fb 야구에 대한 나의 에피소드를 적어 보려 한다. 이유는 <마흔, 마운드에 서다/정범준 작> 라는 책에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나도 작가 아저씨처럼 야구에 대한 책을 한 권 써보고 싶은 목표가 생겼다. 물론 언제 유통기한이 만료될 지 모르는 또 하나의 설레발 일지 모르지만. 

<사회인 야구 필독서>



나는 야구를 하다 팔이 부러졌다. 공에 맞거나 방망이에 맞아서가 아니라 어처구니 없게도 공을 던지다 팔이 부러졌다. 정말로 공만 던졌는데 뼈가 정확히 3등분 되었다. 웃지 마시라. 농담 아니다.

그때는 내가 사회인 야구 시작한 초창기로 기억하니까, 아마 2006년 여름 일 것 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은 경기 시간이 토요일 새벽 6시 30분으로 잡혔다. 새벽 시간으로 잡은 사연이 조금 웃긴데 상대 팀이 ‘유흥업소’ 관계자였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 밤을 새고 근무하고 오셔야 했기에 부득이 경기 시간을 새벽으로 잡아야 했던 것이다. (가끔 ‘언니’들도 응원 오셔서 흐뭇했다.^^)  

이른 시간이라 허겁지겁 노원구에 있는 산업대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스트레칭 없이 바로 게임에 들어갔다. 보통의 경우 아무리 늦어도 목소리가 큰 팀 동료 김병우 선수의 구령에 맞추어서 반드시 체조를 했는데 그 날 따라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신입 회원 한 분도 게임에 선발로 출전했다. 보통 신입 회원은 주로 대타로만 출전하는데 그 날 따라 선수가 부족했던 것이다. 다행히 우익수이기에 공이 안 날라가겠지 했다. 사회인 야구 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회인 야구에서 우익수 쪽으로는 좀처럼 공이 날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잉여’ 분들이 주로 우익수 수비를 맡는다.

사단은 1회 초 시작 하자마자 났다. 대부분의 사회인 야구가 그렇듯이 선두타자는 스트레이트 포볼에 도루, 무사 2루가 되었다. 이어서 나온 2번 타자가 우익수 쪽으로 힘없이 높이 뜨는 플라이 볼을 때렸다. 하지만 방금 말한 오늘이 데뷔전인 신입 이진영 과장님이 우왕좌왕 하시다가 볼을 놓쳤다. 생각보다 야구에서 뜬 공을 잡는 건 쉽지 않다. TV에서 보면 선수들이 쉽게 플라이 볼을 처리하기에 일반인들이 만만하게 보는데 내 장담하건데 처음 야구 하시는 일반인들이라면 백이면 백 다 놓친다.

2루수였던 내가 재빨리 달려가서 공을 잡았다. 공을 잡으려는 순간 이제 막 2루 주자가 3루 베이스를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공이라 잡힐 것으로 생각한 2루 주자가 스타트를 늦게 하였다. 순간 익숙한 프로야구 화면이 뇌리를 스쳤다.

상황은 1:1 동점, 9회 말 2사 2루의 긴장되는 순간. 일단 정확히 맞추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짧게 밀어친 타자의 공은 우익수 앞으로 빠르게 굴러간다. 경기를 끝내고자 2루 주자는 미친 듯이 3루를 밟고 홈으로 질주한다. 전진 수비 하고 있던 우익수는 날렵하게 공을 낚아채서 번개같이 홈으로 공을 던진다. 2루 주자와 포수가 홈베이스에서 격렬하게 뒤엉킨다. 박빙의 순간이다. 둘 다 애절한 눈빛으로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

그랬다. 숱하게 보아왔던 장면이 번개같이 스쳐갔다. 이제 막 주자가 3루를 돌고 있으니 내가 잘만 던지면 홈에서 아웃시킬 수 있다. TV에서 보기만 한 플레이를 내가 직접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프로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주자도 마찬가지다. 공을 움켜쥐고 한발 두발 도움 닫기를 해서 힘차게 홈으로 공을 뿌린다. 내 몸의 모든 에너지를 공에 모았다.

<마음만은 추신수>


그런데 던지고 나자 무언가 이상했다. 공을 던지고 난 팔이 제 위치가 아닌 것이다. 공을 던져보면 알겠지만 공을 던지고 나면 팔이 45’ 각도로 자연스럽게 하반신 방향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팔이 덜렁덜렁 매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뼈가 부러진 것이다. 나중에 병원에서 X-ray를 찍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오른팔 상박 부분(팔꿈치에서 어깨까지)의 뼈가 정확히 3등분 나 버렸다. 의사는 이 부분의 뼈가 사람 신체 중 허벅지와 함께 가장 두꺼운 뼈인데 어떻게 공을 던졌는데 부러지냐고 의아해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옛말에 ‘뼈를 깍는 고통’ 이라는 말이 있다. 고통 중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일컫는 말인데 왜 그 말이 생겼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무지막지 하게 아팠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 다들 어깨 탈구 정도로 생각했다. 당연히 공을 던지고 나서 아파하니 그럴 수 밖에. 그래서 내 팔을 이리저리 만지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상대 팀의 어느 한 분이 약간 아는 것이 있어 탈구 라면 어깨 부분이 부어 오르는데 이상하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 뼈가 부려졌는데 누군가가 뼈를 맞춘다고 이러저리 내 팔을 만졌다면?

급히 차를 타고 산업대 근처 가까운 ‘원자력 병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차가 덜컥 거리니 당연히 그 진동이 고스란히 나의 부러진 뼈로 전해졌다.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 마다 어찌나 괴롭던지. 뒤에 나오겠지만 그런데 그 고통을 노원구에서 분당까지 한 번 더 겪었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나는 아파 죽겠는데 태평한 토요일 응급십 당직 근무자(의사는 물론 인턴도 아니다.) 는 X-ray 부터 찍자고 한다. 한 참 후에 인턴 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오더니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 보이시죠? 3등분 났네요.” 라며 나도 알만한 이야기를 했다. 젠장, 저러고 의사인지. 그런데 웃기는 건 여기가 암 전문 병원 이라는 거다. 원자력 연구소 산하 기관으로 출발해서 산업 재해와 관련된 방사선 연구를 주로 한다고 하였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청둥벌거숭이 같은 인턴이 대뜸 나에게 ‘골수암’ 운운한다. 사람의 팔 상박 부문의 뼈가 얼마나 두꺼운데 공을 던져서 쉽게 부러질리가 없다는 극히 상식적인 설명을 하면서 X-ray 사진을 보니 내 뼈 밀도가 약해 보인다며 정밀 진단을 하자고 한다. 참으로 황당했다.

나는 그냥 공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다 사고가 났고 그저 어깨 탈구 려니 했는데 아닌 밤중의 홍두께도 유분수지 ‘암’ 이라고 한다. 뼈가 부러진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암’ 이라니. 일단 병원에서 일하는 큰누나에게 전화했다. 누나는 자기가 일하고 있는 분당의 재생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아무래도 병원은 아는 사람 있는 곳이 낫다 싶어 분당으로 다시 부러진 팔을 잡고 이동했다. 출반 전에 응급 처지로 뼈를 맞추었다. 두 명이 내 팔을 잡고 으그적 했다. 정말 당한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당에서도 노원에서 했던 것과 똑같이 사진을 찍고 기다린다. 팔이 점점 부어올라서 이제는 손까지 퉁퉁 부어 올랐다. 큰누나가 오고 팀원 중의 이 과장님도 도착했다. 이 과장님이 공만 제대로 잡았어도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 많이 미안해 하시겠지. 그런데 의사는 없다. 토요일이라 당직 의사만 있는데 그 당직은 수술하기 곤란하다고 한다. 이런 황당한 경우라니. 누구는 뼈가 부러졌는데 의사가 없어 수술을 못한다? 누나가 말을 하더니 그냥 병원 말을 듣자고 한다. 전공이 아닌 사람 그것도 당직 의사면 통상 레지던트가 많은데 그 친구가 하면 제대로 수술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월요일까지 참는 게 낫다고 한다. 모르는 환자 처지 인지라 고분고분 말을 듣는 수 밖에. 뼈가 부러진 채로 고스란히 토요일, 일요일을 지내야 될 판이다.

그래도 다행히 X-ray 사진으로 보면 암은 아니라고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원자력’ 병원에서 오버(?) 한 것이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부러진 뼈를 움켜쥐고 주말을 보내고 다음 월요일 수술을 받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전신 마취를 했다. 마취 전, 후의 몽롱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눈앞에서 갑자기 희미해진 수술용 전등, 덩그라니 휑하고 추운 마취 회복실. 간호사가 한마디 한다. “안 깨어날 수도 있어요.” 젠장.

그렇게 철심을 박고 또 그걸 제거하는 수술을 또 했다. 2번이나 전신 마취를 했다. 전신 마취 후 어린 시절 똑똑하다는 소리를 제법 들었던 나는 총기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해 겨울 그라운드로 다시 복귀했다. 모든 사회인 야구 팀이 그렇듯 우리 팀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체 청백전을 겨울에 가졌다. 그 시즌 마지막 게임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판정 받았던 내가 출전 한 것이다. 팀원들이 무척 반가워 했다. 그랬다. 팔이 부러져도 나는 야구를 계속 하고 싶어했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른다. 팔이 부러졌다면 영원히 야구를 그만두어도 이상할 리 없건만 굳이 나는 그 시즌에 바로 복귀를 하고 싶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래의 말과 조금은 유사하지 않을까? 2011년, 그렇게 나의 야구는 계속되고 있다.

야구에 대한 나의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톰글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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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 퇴근 후 렛츠 2기 모임 준비

Posted at 2011. 1. 15. 08:09// Posted in 강의 후기


2011년 1월 12일 희망제작소 분들과 퇴근후 렛츠 1기 분들이 인사동의 한 전통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제작소 내 간사 분들과는 첫 정식 모임이자 새해 인사도 나누는 훈훈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자리 배치가 대강 아래와 같았습니다.

<깍아달라! 못한다>


남 팀장님(지금은 사무국장님 ^^) 포함 제작소 5분은 오른쪽, 이 회장님 포함 렛츠 6분은 왼쪽에 일렬로 앉아 니편/내편 갈랐죠. 네, 그렇습니다. 모임은 정모를 빙자한 ‘협상’ 자리였습니다.

‘올해 렛츠 2기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으니 1기 분들이 참여해서 전체 컨셉도 잡아주시고 사회도 봐주시고 암튼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세요’ 와 ‘월화수목금금금 회사 생활에 아기는 이제 100일 이에요. 직장인들 바쁜 거 잘 아시잖아요’. 팽팽합니다.  

(아, 물론 노련한 남 사무국장의 말빨과 2기를 위한다는 대의(?)에 저희가 조금 밀렸죠. ㅎㅎ)


음식은 참 맛있었습니다.

<남도 음식점 특유의 꼬막과 고등어>


제작소 분들이 화끈하게 쏘셨습니다. 특히 오랜만에 먹어보는 꼬막이 쫄깃했습니다. 예전 시골 살 때는 흔하게 먹던 거라 참 대접을 못 받는 음식이었는데 서울에서는 별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꼬막을 잘한 이 음식점은 이름이 남자만이 아닌 ‘여자만’ 입니다. 참고로 '여자만'이란 여수와 고흥 사이의 만 이름으로 순천만의 옛 이름이라고 합니다.

역시 세상 살이 공짜는 없습니다. 얻어먹는 대가로 렛츠 2기 프로그램 기획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제작소 분들은 올해 2,3회 정도의 렛츠 강의를 계획하고 있는데 2기 강의는 기획 단계부터 1기 분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주시면 훨씬 알찬 강의가 될 것 같다고 하십니다. 품격있는 말빨에 인물 받쳐 주시는 회장님 이하 역량이 되시는 분들도 많고 강의 후에 매달 정모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등 1기 분들의 호응이 너무 좋으니 2기 준비를 해 주시면 제작소가 자체적으로 하는 것 보다 훨씬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있으셨습니다.

자연스레 1기 강의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전체 컨셉이 ‘뒤집어보기’ 였다고 합니다. 경주마처럼 회사에서 정해놓은 한 곳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도로 보자는 의미에서 고령화 사회, 호모루덴스, 균형있는 가정 경제 등의 일련의 강의를 기획 했습니다. 강의 평가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실제 생활의 변화까지 이끌어 내는 분들이 많아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 였다고 합니다.

빨간 운동화에 노란 점퍼를 입고 오신 신호등 김민정 님은 강의 때 나누어 주신 친환경 먹거리 떡과 재활용 품으로 만든 필기구/메모장이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떡 같은 간신류는 당장 회사 내에서 행사 준비할 때 사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서대문 올레길을 만드신 분답게 실제 생활에 적용 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개인적으로 1기 분들 중 서대문 올레길이 가장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2기 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십니다. 강의 초반 1기 분들의 급격하고 과격한 변화 사례를 들려주는 것은 오히려 2기 분들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염려를 하십니다. 강의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또한 사회적 기업 역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안 중 작은 한 가지 이죠.

은근 카리스마 이 회장님은 블로그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제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인 이상 태어날 때부터 DNA가 다른 명사 분들이 오셔서 들려주는 화려한 ‘성공’ 이야기 보다는 우리 주위 사람들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내는 ‘성장’ 이야기가 더욱 감명이 크다고 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1기 분들의 변화의 과정을 스토리텔링으로 블로그에 잘 정리하면 서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품격있는 스피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백수가 되어 걱정거리를 끼쳐 드리고 있는 저는 간단한 발표 자료를 준비하였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시키지도 않은 발표 자료까지 따로 만들었죠.  저는 ‘참여’와 ‘관계’를 키워드로 보고 자원 봉사 형태 등으로 참여 할 수 있는 제작소 내 실제 다양한 사례를 많이 접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드렸습니다. 최근 제유경 이사님이 가르친 중학생들도 평균 연령 14살, 자본금 73만원의 ‘사고 뭉치’라는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데 저희라고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었죠. 그리고 서로 간 휴먼 네트워크를 돈독히 할 수 있도록 2기 분들은 처음부터 페이스북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장 1기만 해도 대학가요제 출신의 최은영 님, 최근 <내 인생이다> 라는 책을 출간하신 김희경 님 등 쟁쟁한 분들이 많으신데 우리가 그 분들을 그냥 모르고 지나친 게 아쉬웠습니다.

<10년 후 밝은 모습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불안 속에 살고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육아 및 보육부터 시작해서 사교육, 청년 실업, 내집마련, 노후대책까지 생의 각 단계마다 개미 지옥에 허덕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글을 돌아가면 이번 협상에서 남 팀장은 저희에게 ‘2기 강의 기획’ 이라는 숙제를 주셨습니다. 회장님 이하 저희는 숙제를 하겠다는 확답은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화기 애매(?) 했던 협상 분위기 만큼이나 저희가 웃으면서 조금씩 아이디어를 나누어주면 저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10년 후’에 조금 더 행복해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 도와주실꺼죠?


p.s
1. 당장 2기 강의 기획을 위해서 전체를 하나를 묶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말씀드렸듯이 1기는 ‘뒤집어보기’ 였습니다.  저는 ‘생활의 작은 변화’ 혹은 ‘불안 사회’를 키워드로 잡는게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쯤 생각하셔서 다음 번 정모에 이야기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제작소 분들은 1월 안에 기획안을 마무리하고 늦어도 3월에는 강의를 시작하고 싶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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