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이란? <자기앞의 생> 리뷰

Posted at 2011. 4. 11. 05:11// Posted in 이 책 읽어 보세요


자기앞의생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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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 이성복 「그해 가을」 中


아버지 씹새끼다. 조금 놀라운가?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 한번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한번쯤이 아닌 사람들도 많을테고. 다만 차마 입으로 말을 못한다. 웬지 아비를 씹새끼라고 하면 '인간' 같지 않다고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자연히 말을 못하게 된다. 말을 못하니 생각조차 희미해지는 것이고.
 
과연 그런데 아비를 '씹새끼'라고 하면 왜 '인간' 같지 않다고 느껴야 되는 것일까?
 
소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주인공 모모의 아버지는 살인자다. 그것도 모모의 엄마이자 자신의 아내를 죽인. 한 번 생각해보라. 자신의 아비가 자신의 어미를 죽인 사람이라는 것을. 다행히(진짜 다행일까?) 모모는 14살이 될 때 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자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모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면 혹시 이상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흔히 '그 사람 참 인간적이다' 등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말의 본질 자체에 의문을 가진다. 과연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정의는 정확히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그 말은 보편 타당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다.
 
주인공 모모는 아직 2차 대전의 상처가 남아있는 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다. 아비는 그 창녀를 관리하는 아랍인 '포주' 다. 하지만 어느 날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던 아비는 어미를 죽여 버린다. 어미는 자기가 관리하던 창녀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웠던 어미가 죽고 모모는 다른 사람의 손에서 자라난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 적인 수준에서 이 아이의 일생을 예측한다면 어떨까? 유명한 살인마 '김길수', '김길태'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는 예상과 다르게 건강한 아이로 자란다. 다른 보통의 아이들 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어떻게 가능했을까?
 
샤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하였다. 비유를 하자면 이 아이의 본질은 살인자와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불행한 아이이지만 이 아이의 '실존'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이에게는 모든 인간들의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 자유에의 의지, 성찰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라고 얕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생각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난다. 그 능력이 주위 환경에 의해서 제약 당할 뿐이다. 다행히도 모모는 끊임없이 되돌아가서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모모를 키운 '기른 엄마' 로자 아줌마의 따뜻함이 있었다. 그녀는 유태인이다. 2차 대전 중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 갔었다. 그 시절 호된 고문의 기억은 평생 그녀를 괴롭힌다. 그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따뜻함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큰 상처를 가진 모모를 정성스럽게 키울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상처가 있기에 다른 상처를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을 것이다. '나치'로 대표되는 수컷의 횡포를 기억하는 로자 아주머니는 아버지가 살인자인 '모모'의 아픔을 감싸 안아준다. 
 
'모모'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다. 모모에게 세상의 지혜를 가르쳐 주신 아랍인 하밀 할아버지, 아프리카 족장 출신의 포주 등 다양한 소외된 사람들이 모모와 로자 할머니의 힘이 되어준다. 특히 아름다운 '여장남자' 룰라 아주머니는 늙고 병들어서 치매까지 걸린 로자 할머니를 매일매일 목욕까지 해 주시면서 마지막까지 진실한 친구가 되어 준다. 

어디에도 정상적인 남자들은 없다. 소위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조건인 부모가 있고 기독교를 믿고 남자이고 프랑스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모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모를 경계할 뿐이다. 그들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다른 사람들, 즉 타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과연 그들이 정말로 '인간' 다운지 따져 봐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처음에 언급한 이성복 시인처럼 아비를 씹새끼 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 모모가 끊임없이 영화를 되돌리기 해서 보는 것처럼 우리 모두 각자 자신의 인생을 계속해서 리와인드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해서 마주해야 한다. 보기 싫은 부문이 있다고 넘어가면 안 된다. 똑바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겁하게 외면하면서 다른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긍정적인 생각, 좋은 생각 등으로 아버지는 그래도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아버지 덕분에 내가 고생없이 자랐다 따위의 말을 하면 안 된다. 아버지들은 고생은 하였지만 타자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그저 자신만이 최고라고 여기고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억압하기 일쑤였다. 아비와 제대로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몇 번이나 되던가.
 
모든 변화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프다고 회피하는 순간 발전은 없다.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여도 영원히 되돌이 표일 뿐이다. 씹새끼를 씹새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치'의 상처를 간직한 로자 아주머니는 병원에서 죽지 않는다. 병원이 상징하는 섣불리 용서하거나 타협하는 곳이 아니라 지하실에서 죽어간다. 지하실은 로자 아주머니의 수용소를 상징한다. 로자 아주머니는 자신이 나치를 기억하는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비록 육체는 치매가 걸려 약해졌지만 정신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모두 아비를 씹새끼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자기 앞의 생'을 살 수 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자기 앞의 인생'인 이유다. 우리는 '우리' 앞이 아닌 '자기'앞의 생을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내야 한다.

아, 물론 모든 아버지가 씹새끼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아버지가 진짜 씹새끼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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