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나서] 침이 고인다_1

Posted at 2009. 5. 31. 23:24// Posted in 책을 쓰자

김애란, 문학과 지성사

'읽고 나서' 쓰는 요령
: 인용구 정리, 인용구에 대한 나의 이야기, 자유롭게 나의 이야기
: 작가가 그렇듯이 나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구나
   (마인드 맵 보다 한층 더 정리되네)

 

피아노 건반의 모양은 똑같다. 그것은 희거나 검었고, 동일한 크기와 질감을 갖고 있었다. p.12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p.15

우리는 그저 당시의 '소문'들을 믿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이과가 취직이 잘 된다더라,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님이 좋다더라, …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중요한 정보인 듯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잊어 버리곤 했다. p.19

막연하게 국문과에 가고, 막연하게 사대에 가고, 막연한 열패감이나 우월감을 갖고 졸업을 하고 진학을 했다. '적성'이 아닌 '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는 일도 잦았지만, 대부분 잘 기획된 삶에 대해 무지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몰랐다. p.21

나는 이 상황에 '적성'을 생각하고 있는 언니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누군가 빨리 자리를 잡아 짐을 덜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언니는 취업이 잘 된다는 말에 서둘러 원서를 쓴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학교 선배가 그러는데, 요즘 계급을 나누는 건 집이나 자동차 이런 게 아니라 피부하고 치아라더라." p.26

"어쩐지 여기, 서울 같지 않아."
언니가 잠 묻은 말투로 대꾸했다.
"서울 다 이래. 네가 아는 서울이 몇 곳 안 되는 것뿐이야." p.28

언니의 컴퓨터는 디귿 키가 잘 먹지 않아 작업 속도를 떨어뜨리곤 했다. 나는 신나게 손가락을 놀리다 번번이 디귿 키 앞에서 멈춰 섰다. … 100년 전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진보적인 기계 앞에서, 내 등은 네인데르탈인처럼 점점 굽어갔다. p.30

내가 곰팡이 얘길 꺼내자 "지하는 원래 그렇다"고 말한 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 '원래 그렇다'는 말 같은 거, 왠지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p.35

그는 조그마한 체구에 순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조금 귀염성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p.39

김애란의 소설에서 가장 탁월한 부문은 "묘사"이다.

"구질구질함"이 아주 "경쾌"하고 "미소"를 짓게 만들게 하는 것이 김애란의 소설 같다.

그의 소설 주인공들은 대부분 200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88만원 세대의 여성들이다. 끊임없이 고시를 치고 있거나 열악한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반 지하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다. 그들의 일상은 당연히 구질구질하다.

자신의 일상, 공간을 유쾌하게 묘사한다. 이건 일본 소설 같다. 하지만 그 주인공들이 우리 세대의 비 정규직 노동자들이므로 우리 세대의 '시대 정신'이 돋보인다.

머랄까? 작가의 주제는 무엇일까? 왜 우리 주위의 88만원 세대에게 집중하는 것일까?
그런걸 시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님 단순히 자기 세대이니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
(자기 세대라고 비정규직만 있는 건 아니기는 하다)

공감하는 이야기가 참 많다. 나의 성장사도 작가가 묘사하는 촌스러움 만큼이나 구질구질하다. 이를 테면 "디귿" 키가 고장난 키보드 묘사처럼. 지금 생각하면 그깟 키보드 새로하나 사면 된다. 그걸 사지 않고 그래도 "디귿"이 완전히 써지지 않치는 않냐 한다. 그러고 계속 힘들게 "디귿"을 쓰고 있다.

어쩌면 나의 성장사는 여기 소설의 주인공보다 '객관적'인 조건은 훨씬 열악했다.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가 보험 회사 다니면서 근근히 4남매를 모두 4년제 대학까지 보냈으니…  할머니는 아마 우리 반 50명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우리 집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내 기억의 내 유년 시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태도가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근거 없는 낙관이기는 하지만 자식에게 '안 된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책은 빚을 얻어서라도 사 주셨고 누나에게는 피아노 학원도 보내 주셨다. 오히려 난 반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공부를 조금 잘 했던 난 아이들에게 얄량한 자존심으로 집이 어려운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티'를 안 낼 수 있도록 군것질을 하고 옷을 사는 것 정도는 가능했던 것이다.

작가에게 부러운 게 이런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이렇게 아름답게 재 창조 하다니. 나에겐 기억 속에 무엇인데 그걸 끄집어 내어 책과 글로써 다른 사람들과 공명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답게. 내면의 독백이 아닌 다른 객관적인 물체로 잘 묘사한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힘일까?

나의 성장사를 표현한다면 아마 김애란 소설 속과 비슷하겠지? 구질구질하고 유쾌하고 혹은 구질구질하지만 유쾌하고, 구질구질하기에 유쾌한 머 그런 이야기들이다. (좀 더 유쾌한 예를 찾고 싶은데 소설엔 잘 없는 것 같기도 하네) 참 구질구질했던 것 같다. 반 지하 생활은 언제나 눅눅했다. 벽지에는 특유의 곰팡이 색깔이 가득했다. 우리 집 TV는 반 쯤 고장이었다. 나는 아무리 '툭' 쳐도 안 되는데, 형님이 '타악'하고 치면 화면이 잘 나왔다. 그런 형은 언제나 나에게 형이었다. 지금은 참 웃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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